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드웨이 해전 (문단 편집) ==== 미군 기지 비행대의 반격과 잠수함 노틸러스의 공격 ==== 비슷한 시간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대들이 7시 5분 일본 함대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랭던 파벨링 대위가 이끄는 VT-8(제8뇌격비행대)소속 [[TBF 어벤저]] 6기[* 원래 VT-8은 어벤저로 기종 변경을 실시했으나 기종 변경을 끝내고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모함인 호넷이 출격한 뒤였다. 1기의 기체도 아쉬웠던 니미츠 제독은 이들 중 일부를 미드웨이로 보냈고, 이렇게 미드웨이로 간 어벤저들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최초로 실전을 치르게 된다.]와 제임스 콜린스 대위가 이끄는 육군 항공대 소속 [[B-26]] 4기로 모두 뇌격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우연히 동시에 일본 함대 상공에 만났기 때문에 연계작전이 불가능했던데다, 어뢰의 신뢰성도 떨어졌기 때문에 피해만 입은채 공격에 실패한다. 4기의 B-26중 2대가 격추당했고, 제임스 무리 중위의 기체가 일본 전투기에게 쫓기다가 아카기 함교에 들이박을 뻔 했다. 다만 들이박기 직전 무리 중위가 급히 기수를 들어올려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하마터면 나구모 주이치를 비롯한 일본군 수뇌부들이 전멸할 뻔했던 이 사건이 이후 나구모의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미드웨이(2019)|미드웨이]]에서도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구모 주이치의 부관이 "특공이었던 걸까요?"라고 묻자 나구모가 "미국 놈들은 그럴 정도로 용기있는 놈들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밴저의 상황은 더욱 나빠서 파벨링 대위를 비롯한 6기중 5기가 격추되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앨버트 어니스트 소위의 기체도 피격되어 18살의 후방사수 바실 린치가 전사했으며, 당시 17살이었던 무전수 해리 페리어는 기절했다.[* 해리 페리어는 17살이어서 입대가 불가능했지만 서류를 조작해 입대했다.] 한참 B-26과 VT-8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던 7시 10분 월리엄 H. 브로크먼 주니어 소령이 이끄는 나왈급 잠수함 USS 노틸러스는 북서쪽 수평선 너머 폭연과 대공포화를 발견하고 일본군 기동함대로 접근하기 시작했고 8시경 일본군 기동부대의 한복판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이 잠수함 하나로 인해 일본군은 큰 손해를 보게 된다. 노틸러스가 기동함대 한복판으로 접근하고 있던 7시 55분경 로프톤 헨더슨 소령[* [[과달카날 전투]]의 메인 무대였던 헨더슨 비행장이 바로 이 사람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이 이끄는 [[SBD 돈틀리스]] 16대가 일본 제1항공함대 상공에 도착하였다. 헨더슨 소령은 비행대를 8기씩 2개의 비행중대로 나누어 각각 히류와 소류를 공격하기도록 했고 엘머 글리던 대위에게 1개 비행중대의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일본 함대 상공을 초계하던 [[제로센]]에 걸려서 6기의 돈틀리스가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격추당하고 말았다. 헨더슨 소령도 제로센에 격추당해 전사했다. 이때 헨더슨은 이왕 죽는 거 동귀어진의 심정으로 카가에 충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해수면에 추락했다. 이후 글리던 대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남은 10기의 돈틀리스를 이끌고 히류를 공격했다. 그러나 돈틀리스가 떨어뜨린 폭탄은 모두 히류에서 빗나갔다. 히류 또한 대공포와 대공기관포로 돈틀리스를 공격했지만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폭격을 마친 돈틀리스는 철수 도중 제로센에게 2기가 더 격추당하여 8기가 미드웨이로 귀환했으나 이중에서 6기는 다시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된 상황이었다. 핸더슨 소령의 공격이 한참 진행 중이던 8시 10분, 17분 노틸러스는 기동함대의 선두 부대에 공격을 가하기 위해 자세를 잡던 도중 나가라에 의해 폭뢰공격을 받고 잠항을 했다. 25분 노틸러스는 기리시마를 향해 어뢰2발을 발사했으나 한발은 불발되었고 한발은 기리시마가 여유롭게 피하는데 성공했고 30분 다시 폭뢰공격을 받아 잠항으로 서쪽 외곽으로 피하였다. 동시에 헨더슨 소령의 부대에 이어서 8시 30분경에 벤자민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구형 SB2U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 11기가 도착했으나 이들 역시 피해만 입은 채 공격에 실패했다. 핸더슨 공격대와 빈디케이터들이 박살나던 동안 이스턴 섬에서 발진한 윌터 스위니 대위가 이끄는 [[B-17]] 폭격기 15기가 수평 폭격을 가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실패했다.[* 웃긴 건 이때 미군 폭격기들이 찍은 폭격 장면들이 꽤나 그럴싸했던지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육군은 이 사진을 근거로 '미드웨이에서 일본군 때려잡은 건 우리 폭격기들이다.'라고 철석같이 믿고 떠들어댔다. 단순 직선운동도 아니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움직이는 이동목표를 무유도 폭탄의 수평폭격으로 잡는 것은 기술력이 발달한 21세기에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 당시 폭격기 만능론에 심취했던 미 육군 항공대는 당대 최신장비였던 [[노든 폭격조준기]]에 대한 과신이 상당했다. 하여튼, 전쟁 중에 아군과의 괜한 불화를 원치 않았던 미 해군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전쟁이 끝난 뒤 진상이 알려지면서 미 육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종합하자면 첫 공격은 성과가 없었다. 노리스 소령이 지휘하는 SB2U 빈디케이터 편대는 2기가 격추되고 1기가 불시착했으며 스위니 대위가 지휘하는 B-17의 피해는 없었다. 공격이 한참 진행중이던 9시 서쪽으로 잠항하여 도주했던 노틸러스가 다시 접근 했고 대공포를 쏘아대는 소류를 발견하고 접근하였다. 9시 10분 마지막 어뢰를 소류에 조준하던 도중 호위역할을 맡고 있던 나가라와 아라시가 접근하여 폭뢰 공격으로 무산시켰고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이 잠수함을 잡기 위해서 아라시 함장 와타나베 야스마사 중좌는 노틸러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시간 가까이 3차례나 공격을 가해온 이 노틸러스호를 추격하기로한 이 결정은 10시 25분 단 5분만에 전세를 뒤집는 대공격을 불러오게 된다. 8시부터 9시까지 한시간 넘게 진행된 미군의 공격으로 일본 함대는 대혼란에 빠지는데, 미군 조종사들의 공격에 맞서 일사불란한 회피기동을 할 때마다 함상 작업이 중지됐으므로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더 잡아먹는 판에, 함대 진형에 끼어들어 어뢰공격을 감행한 미군 잠수함 노틸러스를 잡으러 다니느라 항공모함, 호위함정 할 것 없이 함대 진형이 죄다 흐트러지고 말았다. 거기에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의 공격과 이들을 막으려는 제로센들의 요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1차 공격대가 함대 상공에 도착해서 착함을 기다리는 등 바다와 하늘 모두 그야말로 개판에다 난장판이었다. [[필리핀 해 해전|미군처럼 무전기와 레이더가 충실하고 별도의 통제 시설까지 건실히 갖췄다면 아군 함정들과 항공기들을 적절히 통제하며 이런 상황에 대해 대응 가능]]했을지도 몰랐지만, 당시 일본 함대의 통제 수단은 수신호, 발광 신호, 조명탄, 연막이 전부였고 통제 시설이라곤 일본 항모 특유의 좁아터진 함교 뿐이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은 제1기동함대 수뇌부들의 상황 파악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때 일본 함대가 거둔 전과는 모두 제로센에 의한 것이었고 대공포화에 의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례로 헨더슨 부대에서 격추된 돈틀리스는 전부 초계하던 제로센들이 대함 공격 전후에 격추시킨 것이며, 대공포는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출격한 16기 중 헨더스 소령을 포함한 6기는 일본 함대 공격 전에 초계하던 제로센에 격추되었고, 남은 10대가 히류 공격을 시도했으며, 이후 퇴각 중 2기가 추가로 제로센에 격추되었다. 더군다나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군 조종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어서 대공포화를 제대로 회피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전 미군 조종사 중에 가장 미숙한 대원들로 구성된 헨더슨 부대의 경우, 전투 경험은커녕 미드웨이에 오기 전까지 돈틀리스 조종 경험도 없었다. 때문에, 일반적인 급강하 폭격을 하지 못하고 낮은 각도로 진입하여 폭격하는 전술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폭격 전술은 대공포화에 당하기 딱 좋은 전술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방공망이 수준 이하일 경우에나 통하는 전술이었다. 당시 일본 해군은 미, 영 해군이 도입했던 대공방어에 효율적인 윤형진을 도입하지 않은 상태였다. 레이더가 없었던 일본 해군은 호위함들을 가급적 최대한 함대 바깥쪽에 배치하여 원거리에서 내습하는 적기나 적함 탐지용으로 사용했는데 이렇게 되면 각 함들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벌어져 효율적인 대공화망을 구성할 수가 없었다. 또한 개함 대공병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기함인 아카기는 구식인 10식 45구경 12cm 고사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며(미드웨이 작전 후 신형 고사포로 교체 예정이었음) 고사포좌의 위치가 너무 낮게 붙어있어 직상방이나 반대방향으로의 사격이 불가능했다. 카가의 경우 아카기보다 신형인 89식 40구경 12.7cm 고사포를 장착하고 있었으나 구식인 91식 고사기(사격통제기)를 사용하고 있었다(나머지 세 척은 94식 고사기 장착, 91식은 사격제원 입력과 계산, 추적이 수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반해 94식은 반자동식이라 대응시간의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아카기와 카가에 비해 히류와 소류는 신형 대공포와 고사기를 장착하고 있어서 사정이 조금 나았다. 그러나 4함 모두에서 근거리 방공을 담당하는 96식 25mm 대공포는 사거리가 짧고 수동으로 포좌를 조종해야 하며 급탄이 탄창식이어서 지속사격이 불가능하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물론 사거리는 소구경 기관포의 한계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저 시절에 탄창식 기관포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기는 했다. 물론 미국의 기관포에 비해서 탄창을 자주 갈아줘야하니 불리한것은 사실이지만 저 쓰레기같은 물건이 추축국 대공기관포 중 2위는 하는 물건이라는게 함정. 추축국 대공화력의 문제는 40mm급 기관포의 부재가 제일 큰 원인이다. 종합적으로 일본 주력함의 대공화기로는 유효한 개함방공이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고 실제 적의 공습을 피하는데는 대공사격보다 상공엄호기나 회피기동에 크게 의지했다. 이 날 일본 항공모함이 이 날 자함의 고사포로 확실하게 격추시킨 미군기는 카가가 격추한 돈틀레스 1기 뿐이라는 것만 보아도 일본함선의 개함 대공방어 능력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토록 빈약하고 비효율적인 대공포화는 얼마 안가 일본함대에게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